기구한 삶과 기구한 사랑- 모딜리아니(큰 모자를 쓴 잔느 에뷔테른)
19세기가 들면서 회화는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진기가 발명되면서부터 사실적인 표현만으로는 더이상 이름을 날리 수 없었던 화가들은 대부분 심미안적 피안을 건설해서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그 당시 입체주의와 야수주의가 되는 것이죠.
야수주의가 뿜어대던 색채의 광기가 그러했으며 입체주의가 집착을 했던 형태 파괴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모딜리아니가 있었죠.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색채의 광기도 형태의 파괴도 없습니다. 당시를 살면서 입체주의자나 야수주의자들과 교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는 그들의 사조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떻게보면 따라하지 조차 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딜리아니
순수하게 자신이 생각했던 아름다음을 그대로 그린것에 불과 합니다.
36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보헤미안적인 생활을 했던 모딜리아니입니다.
물론 매일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았던 것을 찬양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이해만 한다는 것이죠.
그림을 그려 벌어들인 얼마되지 않은 돈마저 쾌락을 위해 썼던 모딜리아니이지만 결핵이라는 병을 안고 있는 그로써는 그렇 수도 있었겠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죠. 자신의 병을 안 모딜리아니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이야 병도 아닌 병이 되어버렸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걸리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병이었죠.
따라서 모딜리아니는 '벼랑끝을 향해 달려가는 브레이크없는 기차'와 같았습니다.
그런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그냥 남은 생을 지신이 하고싶은 것을 하고 살아가는데 사용하고자 마음 먹었다는 것이죠. 이미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삶에 '희망'이 중요하겠느냐말이죠.
아무튼 모딜리아니는 다가오는 죽은 앞에서 '보헤미안적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술과 마약을 제외하고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사랑'입니다.
▲잘생긴 모딜리아니 ▲잔느 에뷔테른
따로 언급을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모딜리아니하면 당대최고... 아니 미술사를 통털어 '가장 잘생긴 미남'화가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수많은 연인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기도 했죠.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가 놓지 못하고 지키려했던 사랑은 바로 '잔느 에뷔테른' 이라는 한여인이었습니다.
1917년 봄 몽파르나스의 화가들 모임에서 처음만난 둘은 서로 '운명적인 사랑'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리곤 죽음이 서로를 갈라 놓을 때까지 정말 불꽃의 소용돌이 같은 사랑을 했죠. 아니 어떻게 보면 죽음도 그 둘을 갈라 놓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모딜리아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바로 이틀뒤 잔느도 모딜리아니를 따라 스스로 몸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천국에서도 모딜리아니의 모델이 되겠다'라고 말을 하곤 말이죠.
그 당시 잔느의 뱃속에는 모딜리아니의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할 정도였다면 얼마나 둘의 사랑이 뜨거웠고 컸는지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어머니가 뱃속에 아이를 포기할 정도로 모딜리아니에 대한 그림움과 슬픔이 큰 탓이었겠죠.
모딜리아니 / 큰 모자를 쓴 잔느 에뷔테른/ 1918년경 / 캔버스에 유채 / 53x 37.5cm / 개인소장
여기 모딜리아니가 그린 잔느가 있습니다.
그림속에 있는 그녀는 턱에 손가락을 가져다 된채 수줍게 웃고 있습니다.
잔느가 이렇게 생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는 잔느를 이렇게 그렸죠.
물론 잔느뿐만 아니라 모딜리아니가 그린 모든 인물이 다 이렇게 형태가 변형되어 있기는 합니다.
마치 소심한(?) 캐리커처를 그린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이게 모딜리아니 그림의 특징입니다.
잔느는 얼굴이 길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달걀형의 긴목이 아름다운 잔느를 유연한 곡선으로 강조해서 길쭉하게 그렸습니다. 모딜리아니 눈에는 그렇게 보인 것이겠죠.
그의 눈에는 잔느의 긴 목이...
달걍형태의 얼굴이 아름다움이었던 것이고 그런 긴형태의 선들이 만들어내는 유연한 곡선들이 아름다움이었던 것입니다.
유연한 곡선과 긴선은 부드럽습니다. 그 부드러움이 잔느를 더욱 더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방법을 추구하면서 어떻게보면 당시 유행했던 야수주의나 입체주의와 같은 미술사조에 반대되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해서 표현했던 것입니다.
큰 모자 끈에서 얼굴로... 얼굴에서 목으로... 그리고 코에서 손가락을 거쳐 손으로 떨어지는 곡선을 보자면 영원히 변하지 않을 아름다움을 담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조금 더 추상적으로 생각을 하자면 모딜리아니는 사람의 얼굴이... 사람의 몸이 영원 불변의 아름다움인 것이며 그런 인간들 중에서 '잔느 에뷔테른'의 얼굴은 그에게 있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최고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입니다.
▲미(美)완성을 위해 그리지 않았던 눈부분
모딜리아니는 눈을 잘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그림이 가지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죠.
아몬드 형태의 회색을 띠는 눈...
특히 잔느를 그린 그림들을 보면 대부분 눈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인물들을 그릴 때보다 더 소극적인 표현이었던 경우가 많은 것이죠.
왜그랬을 까요?
모딜리아니는 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영혼을 표현할 수 있을 때만 눈을 그리겠다' 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만큼 모딜리아니는 눈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 신중에 신중을 기했던 것이죠. 저희 나라에서도 예로부터 '눈'을 '마음의창'으로 여겼었죠?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고 영혼이 담겨있는 부분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모딜리아니도 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죠.
다르게 생각을 한다면 저의 생각입니다만 '미(美)완성은 미(未)완성이어야만 한다'
어느 한부분을 의도적으로 미완성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영원히 지속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이 표현되었을 때 그 그림은 방점을 찍게 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 그림은 완성할 수 있겠지만 그 그림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나 인물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역시 방점을 찍으므로서 미의 완성...
미의 결말을 맺게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이야기라하더라도 ' 왕자님과 공주님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먹고 잘살았답니다' 한다면 더 이상 그 이야기의 전개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물론 잔혹동화로 새로운 이야기 전개를 이끌어 갈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아무튼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모딜리아니는 의도적으로 눈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미완성의 미'를 말이죠. 잔느에게 느낄 수 있는 외적인 아름다움은 끝까지 보여주되 다만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잔느의 영혼이나 진심 등 내적인 아름다움은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놓은 것이죠.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에 '상상의 날개'가 얼마나 아름다운 인물이 되는지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리라 생각을 합니다. 짝사랑이나 첫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것이죠.
아무튼 모딜리아니는 잔느의 아름다움을 전부 저희들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화룡점정'의 의미로 눈을 그릴 수 없었는지도 모르죠.
눈을 그리면 잔느가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같은 곳에 묻혀있는 모딜리아니와 잔느
모딜리아니의 그림에는 그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느낌이 있고 표현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아름다움을 더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었고 나아가 그렇게 볼 수 밖에 없었던 그의 기구한 삶이 있었습니다. 시한부인생을 살면서 술과 마약에 찌들어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단한번도 놓지 못했던 사랑 '잔느'가 있었던 것이죠.
삶의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그의 그림이 절망적이기보다는 쓸쓸하고 애잔한 채색에서느껴지는 것은 잔느에 대한 희망을 갖고 싶었던 모딜리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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